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뮌헨 폭동 (문단 편집) == 뒷이야기 == * 사건을 다룬 주심판사 [[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]]는 히틀러 집권 후 히틀러로부터 은혜를 보답받아 바이에른 대법원장까지 승승장구했다.~~이른바 '''은혜갚은 총통'''~~ 나이트하르트는 1941년에 죽었으며 그의 유족들은 [[탈나치화]] 과정에서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고 한다. * 반쿠데타 진압에 앞장섰던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는 이때의 원한을 잊지 않은 히틀러에 의해 [[장검의 밤]] 때 숙청되어 사망했다. 소르프와 자이서는 숙청은 피했다. * [[에리히 루덴도르프]]는 자신의 명성을 앞세워 무죄판결을 받아내지만 민족주의 진영에게 많은 불신을 받았고 이후 대선에서 자신의 상관이었던 [[파울 폰 힌덴부르크]]에 의해 처참히 발리고 정계를 떠났다. * 이 쿠데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노병들은 이후 나치당에서 대부분 유력한 위치에 올랐다. 다만 기이하게도 히틀러와 함께 가장 강경한 인물로, 바이에른 검찰이 끝까지 가석방에 반대했던 [[헤르만 크리벨]]은 괴벨스, 리벤트로프 등 새로 떠오른 거물들과의 불화로 인해서 [[주중 독일 군사고문단|주중 군사고문]], 상하이 총영사, 국회의원 수준에서 커리어를 끝냈다. --외교를 때려치운 독재국가라는 나치 독일의 특성을 고려하면 뒤의 두 직책은 사실상 허수아비와 거수기-- * 쿠데타가 일어난 뷔르거브로이켈러는 이후 나치당의 성지가 되어 회의도 자주 열리고 기념식도 이곳에서 개최되었으나 [[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 폭파 사건|1939년 히틀러 암살기도]][* 1939년 11월 8일 발생한 사건이다. [[게오르크 엘저]](1906~1945.4)라는 사람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폭탄을 설치했는데 그가 평소와 달리 일찍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. 엘저는 사건 발생 시간 직전에 스위스 국경에서 체포되었고 이 암살 기도의 주모자임이 밝혀지자 모진 고문을 받았다. 그리고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독일의 패전 직전인 1945년 4월 수용소에서 상부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.] 당시 터진 폭탄으로 크게 파손되었다. 이후 나치는 이곳을 수리, 복원하고자 했으나 [[제2차 세계 대전]] 도중의 물자 부족으로 이뤄지지 못했다. 연합군의 공습 당시에도 운 좋게 폭격을 면했으나 1979년에 지역 재개발 과정에서 철거되었다. 이후 호텔과 문화센터가 자리잡았다. * 그저 장소를 대여했을 뿐인 맥주 회사 뷔르거브로이는 전후에 같은 뮌헨에 살던 뢰벤브로이에 인수되었다. * 이 사건은 훗날 영화 [[강철의 연금술사]] [[샴발라를 정복하는 자]]에서 간접적으로 묘사되었다. 이를 패러디한 [[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]]에서 멘붕한 히틀러를 체포한 사람이 [[매스 휴즈]]. * 폭동 당시 사망한 나치당원의 피가 묻은 [[하켄크로이츠]] 깃발 [[블루트파네]](Blutfahne)는 나치당에서 신성한 물건이 되어 히틀러가 공식 행사에서 주로 사용하였다. * [[헤르만 괴링]]은 이 사건으로 고환 1개를 적출해 히틀러처럼 하나만 남았다. 게다가 이때의 후유증으로 괴링은 주기적으로 모르핀을 비롯한 마약을 투약받기 시작했고 2차대전기 괴링의 판단력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원인이 되었다. [[분류:바이마르 공화국]][[분류:전간기]][[분류:폭동]] [[분류:1923년/사건사고]][[분류: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]][[분류:아돌프 히틀러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